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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정보32

고도와 위도는 언제부터 사용했나? 고도와 위도는 언제부터 사용했나? 고도와 위도라는 개념은 영국의 발명가 해리슨이 1736년에 런던의 경도 심사국에 크로노미터를 소개하면서 들어섰다. 크로노미터는 하루에 0.1초의 오차만 허용할 정도로 그 당시 기술로서는 굉장한 정확성을 자랑했다. 이는 0도의 그리니치 시간을 기준으로 지역의 시간을 통해 고도를 조정할수 있도록 해준 장치다. 비록 이 장치는 무게가 약 30킬로그램이나 나갈 정도로 무겁고 복잡하며 섬세했으나, 여러해에 걸쳐 개선되면서 악천후에도 항해에 사용할수 있게 되었다. 2014. 10. 15.
최초의 나침반은 얼마나 오래되었나? 최초의 나침반은 얼마나 오래되었나? 최초의 나침반은 기원전 1세기경 중국인이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중국인들은 천연 자석을 표면 위에 올려놓으면 항상 북쪽을 가리키는 것을 발견했다. 또 600년경에는 중동 항해사들 역시 나침반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고, 이들이 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나침반 역시 건어온 것으로 보인다. 14세기경 유럽 선박은 나침반을 이용한 해도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포르투갈의 왕자이자 항해사였던 엔히크가 항해사들과 지도 제작자들에게 보다 정확한 해도를 만들 것을 장려하면서 나침반의 보급이 원활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세기경 나침반의 가장 큰 결함을 발견한 것은 콜럼버스다. 콜럼버스는 신세계로 항해하던중, 나침반이 북극성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2014. 10. 15.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 선서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 선서 오늘날 의대생들이라면 한번씩 행하는 선서가 바로 히포크라테스 선서이다. 비록 선서 내용은 나라마다 다를 수 있지만, 핵심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위해 나의 능력과 판단을 사용할 것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겠노라" 히포크라테스(B.C. 460~377년경)는 그리스의 의학자로 코스섬에서 활동했다. 그는 무속신앙에 기반을 둔 이전의 의학자들과는 달리, 질병에는 설명할수 있는 장연적 원인이 존재할 것이라 믿었다. 또한 그는 질병이 연구되고 정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이 오늘날 현대 의학의 기반이 되었으며, 이런 이유에서 그를 '의학의 아버지'라 부르고 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전해지는데는 로마제국의 갈레노스의 .. 2014. 10. 14.
역사상 최초의 의사는 누구인가? 역사상 최초의 의사는 누구인가? 오늘날은 발달된 의학기술로 인간의 수명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질병 치료를 위해서 배를 가르고 병든 부위를 치료하기 위한 수술이 시작된 것도 얼마되지 않은 일이다. 과거에는 주술사들이 질병을 치료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믿었던 시대가 오랫동안 지속되었기때문에 신께 주술사의 능력이나 신께 기도를 올리는 것을 통해서 병을 치료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의학적으로 병을 치료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의사는 누구일까? 그 주인공은 바로 기원전 2600년 전에 이집트에 살았던 임호텝이라는 사람이었다. 그 당시 이집트는 의학에 커다란 진보를 이루고 있었다. 상처와 골절 그리고 종양에 관한 저서가 이미 존재했다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사실이다. 의학적인 지식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2014. 10. 13.
바흐를 기준으로 음악사를 양분하는 이유 바흐를 기준으로 음악사를 양분하는 이유 학자들이 바흐를 기준으로 음악사를 양분하는 이유는 바흐가 그만큼 음악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바흐는 1100여 편이나 되는 곡을 남기며 작곡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비록 그의 업적은 일생동안 명성을 얻지 못했고 일부에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었으나, 바흐의 업저과 혁신의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음악이라는 분야를 정의하는 데 꽤 많은 부분을 기여했다. 조정음보는 그의 창작물이었으며, 오늘날 표준으로 인정받는 건반 연주법 또한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연대기적으로 보았을때 바흐는 1600년부터 그가 세상을 뜬 1750년까지 지속되었던 다채로움과 다작의 대명사, 바로크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바흐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어서 그의 음악은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의 .. 2014. 10. 13.
사진은 언제부터 예술로 인정받았나? 사진은 언제부터 예술로 인정받았나? 1900년대초, 앨프리드 스티글리츠는 '현대 사진술의 아버지'로 인정받았다. 스티글리츠는 유년 시절부터 줄곧 사진에 관심이 많았다. 두살때는 사촌의 사진에 빠져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 적도 있었다. 아홉 살때는 한 전문 사진가가 흑백 사진에 색소를 입히는 것을 보고 사진의 질을 떨어뜨리는 해위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1887~1911년에 스티글리츠는 사진술을 하나의 예술 장르로 승화시키기 위해 애썼다. 물론 때로는 조롱받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진이 그림의 한 부분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또 미국의 정서를 사진에 담으며 차별화를 두려고 노력했다. 그가 중점을 둔곳은 바로 뉴욕시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02년 스티.. 2014. 10. 13.
신성 재판이란 무엇인가? 신성재판이란 무엇인가? 이 재판 체계는 비이성적으로 방법으로 혐의를 받은 자가 유죄인지 무죄인지 결정하는 방법으로, 476년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유럽의 야만인이라 불리는 게르만족의 법이 들어오면서 성행되게 되었다. 신성재판(trial by ordeal)은 어떤 이가 범죄 혐의를 받고 고소되었을때, 혐의자에게 육체적 고통을 가한 뒤 이를 이겨내면 무죄로 인정한 법이었다. 예를들어 혐의를 받아 법정에 선 사람이 눈가리개를 씌우고 곳곳에 칼날이 박혀 있는 길을 무사히 통과하거나 경미한 상처만 입는다면 무죄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또 뜨거운 불판이나 물속에 빠뜨리는 일도 재판과정에 사용되었으며, 만약 고소당한 자가 일정 기간 안에 회복하면(보통 3일) 무죄로 인정해주었고, 그렇지 못하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당.. 2014. 10. 10.